저자: 에쿠니 가오리 / 김난주 옮김
출판사: 소담출판사
출간: 2004년
밤, 침대로 들어가려는데, 어이, 하고 오랜만에 그것이 찾아온다. 나는 할 수 없이 문을 열고 맞아들인다. 아무도, 절망을 내쫒을 수 없다.
우리는 마주하고, 천천히 말을 주고받는다. 잘 지냈어? 별 문제 없었던 것 같은데. 절망은 그렇게 말하고, 친근한 몸짓으로 내 무릎을 톡 톡 친다. 침대에 들어가 얌전히 베개에 등을 기대고 있는 내 무릎을.
...
이제 갈게.
절망이 말한다. 절망은 어린 시절 얘기를 좋아한다.
그럼 또 보자. 잘 자고.
절망이 그렇게 말하고 나간 후에야 나는 겨우 잠든다.
갑자기 외로워지고, 애인의 미소도 그 외로움을 치유해주지 못한다.
외로움은, 불쑥 찾아와 입을 쩍 벌린다. 그런 때마다 나는 걸려 넘어져 송두리째 삼켜져버린다.
"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착각이야. 인생은 황야니까."
"히스클리프?"
동생이 말을 돌린다.
"그래. 폭풍의 언덕이지."
동생은 잠시 생각하고서, 하지만, 이라고 말했다.
"하지만 샛길이란 게 있잖아. 모두가 다녀서 자연스럽게 생긴, 좀더 걷기 쉬운 길이 분명히 있잖아."
나는 그만 웃고 만다.
"그래, 그렇지."
라고 대답하고서, 생각한다. 나는 애써 태어났으니, 스스로 샛길을 만들고 싶다고.
그 길쭉한 네모로 나는 의자를 만들었다. 조그맣고 예쁜, 그러나 아무도 앉을 수 없는 의자를.
웨하스 의자는 내게 행복을 상징했다. 눈앞에 있지만, 그리고 의자는 의자인데, 절대 앉을 수 없다.